좋은건 좋은게 아니다
네이버 웹툰 중에 화요일에 연재하는 <열정호구>라는 작품이 있다. 보통 웹툰 작가라 하면 기안84같은 자유분방한 삶을 떠올리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위에서 정해준 가이드라인에 따라 공장처럼 웹툰을 그려내는 일개 직장인이다. 예술,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부조리한 사회생활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보다보면 감정을 이입해서 괜히 열이 받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네이버 화요일 웹툰 <열정호구> 111화
이미지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문제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몇 년만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면 일해보면 만화보다 현실이 더 암담하고 거지같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뒷방 늙은이들처럼 아쉬운 소리만 백날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과에 따른 원인을 나름 분석해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여기서 기술직이라 함은 목공이나 타일같은 숙련직 직업군을 이야기한다. 일 자체로만 보면 몸이 힘들고, 외부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형적인 블루칼라 직종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시급이나 일급으로 책정이 되며 초심자도 최저시급을 상회하는 돈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연장근무에 대한 보상도 명확하다. 대신 몸이 상하고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으며 산업재해의 위험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많은 화이트 칼라 직장인들이 회사를 때려치고 기술을 배워 일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막상 대기업에 들어가도 정년이 보장받는 것도 아니며, 급여를 많이주면 그만큼 야근에 회식에 건강도 해치고 일 자체의 성취감도 낮은 편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대기업을 그만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중 하나도 일 자체에 대한 보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획서를 쓰더라도 상사의 꼬투리 하나땜에 엎어지는건 다반사고, 비이성적인 이유로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부품처럼 일하지만 남는것은 조금 많은 급여 뿐이다. 연차는 쌓이는데 일 자체의 전문성이 없으니 퇴직후에는 할 일이 없어서 다들 치킨 가게를 차리고 결국에는 망하는 수순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꽤 있을 것이다.)
반면 목공이나 용접같은 기술직은, 일단 몸은 힘들지만 온전히 일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며, 일에 대한 성과도 뚜렷하다. 일한 만큼 돈이 나오기 때문에 야근을 하면 그만큼 급여가 늘어날 뿐이다. 일당도 과거보다 많이 올라서 급여로만 따지면 어지간한 대기업 사원보다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사대보험이 없는 경우가 많고, 계절에 따라 수입이 들쭉날쭉이라는 큰 단점이 있다. 수입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리기도 어렵고, 대부분이 하루를 벌어 전부 탕진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그만큼 자기절제의 능력이 요구되는 직업군이기도 하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디자인 인건비는 왜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을까? 10년전 단가표가 2018년까지 변동없이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으며, 일부는 가격이 더 떨어지기도 하다. 물론 아이폰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끈 이유가 애플의 디자인이라는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사례다. 일반적인 디자인은 소소한 명함, 리플렛, 인테리어 등등 정말 사소한 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의뢰가 들어오면 요구사항에 맞춰서 기존 템플릿을 약간씩 수정해서 서로 조율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2D나 편집디자인쪽은 이미 시장이 기울어서 다같이 가라앉는 중이고, 그나마 자리를 지키던 3D 쪽도 최근들어서는 가격 후려치기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상이나 게임, VR과 같은 신사업 쪽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유독 디자인 노동이 수요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중학생 때였나, 처음 포토샵을 접하던 시기가 포토샵 4 버전이 나올 때였다. 그 때는 포샵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이지도 않았고, 관련 서적도 많지 않던 때였다. 컴퓨터 사양도 그리 높지 않아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글자에 그림자 하나만 넣어도 컴퓨터를 잘한다고 여기던 때였다. 대충 영화 CG의 발전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90년대 의외의 CG를 보여주었던 터미네이터 2를 제외한다면, CG의 대중적 사용은 아마도 반지의 제왕일 것이다. 아바타를 거치면서 CG 퀄리티는 실사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발전하였다.
(좌) 터미네이터 2 (우) 아바타
가정용 컴퓨터의 사양도 무어의 법칙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왔다. 관련프로그램도 계속 업데이트 되며 초보자도 쉽게 사용할 만큼 대중화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한달 정도만 배워도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프로그램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과거보다 사람이 똑똑해졌다기 보단, 프로그램이 사람에 맞춰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전에는 2~3일이 걸리던 일도 이제는 하루도 채 안걸려서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3D 분야는 더욱 심하다. 예전에는 조감도 1컷을 만드는데, 렌더링만 하루종일 돌렸다면, 이제는 최신사양으로 맞추면 길어야 3~4시간이면 충분하다. 가끔 컴퓨터 강사들이 조감도 한 컷에 80~100만원을 받았다고 자랑조로 이야기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미지는 촌스러워서 아무도 취급하지 않으며, 조감도에 서비스 이미지까지 더 해서 50만원도 못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는 분야에 차이가 있음)
게다가 작업시간의 단축을 도와주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디자이너의 일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반대로 디자인 업무 자체를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유독 예체능 계열 학생들이 많다. 특히 인구대비 디자인 관련 전공생을 추려보면 더욱 심각하다. 게다가 순수미술을 전공한 학생들도 취업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다들 디자인 계열의 취업을 희망하니, 한해 관련 공급 인력만 수 만명에 달할 것이다. 그 중에서 일부 소수의 학생들만 대기업 디자인팀으로 입사가 가능할 것이고, 나머지는 소규모 스튜디오, 그 아래는 영세기업으로 들어가거나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으로 도피해버린다. (물론 아닌 경우도 많지만 실제 상당수 대학원생의 실태는 취업 유예라고 봐도 무방하다.)
4년제 대학뿐만 아니라 전문대, 직업학교, 디자인 스쿨 등 수많은 곳에서 인력이 쏟아져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가 아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대표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스티브 잡스 (좌)와 조너선 아이브 (우)
어자피 실무에서 진행하는 디자인은 대개 촌스럽고 조악하다. 대기업이 아닌 이상에야, 일을 하청받아 진행하면 거래처에 끌려다니기 쉽상이고, 디자이너들이 꿈꾸던 디자인은 철처하게 조각내고 훼손되어 너덜너덜해져 버린다. 그렇게 현실에 적응하거나, 아님 포기하고 공무원 학원으로 향하거나, 금수저가 아닌 이상에야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예전에 피카소가 길거리에서 한 여인의 초상화를 5분정도 그려주고 한화로 8천만원의 큰 돈을 요구했던 사건이 있었다. 여인이 가격에 대해 항의하자 피카소는 "방금의 나는 연필질을 몇 분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40년이 걸렸소" 라는 말로 대답했다.
디자인도 이와 비슷하다. 의뢰를 받고 작업을 시작해서 완성하기까지의 일 자체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그보다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적절한 색감과 배치, 완성에 대한 디자이너의 대적 고민, 그리고 그정도의 스킬을 갖추기까지 노력해던 노력의 시간이 곱절 이상은 길다. 이건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축적되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일을 맡기는 사람들을 그것을 모른다. 대충 작업량을 보고 가격을 책정한다. 그래서 디자인쪽은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좋은건 좋은게 아닌데, 밥한끼 사준다는 명목으로 무급과 열정페이가 끊이지를 않는다.
결국에 남의 일을 받아서 진행하는 일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소모품처럼 쓰여지다 수명이 다하면 버려질 뿐이다. 게다가 디자인 직종의 정년은 대개 40대에 끝이 난다. 그 이후에는 관리자로 승격하지 못하면 대부분 시장에서 도태되어 사라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일정 나이가 넘어가면 전문성보다는 관리직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평생 디자인, 예술가로 살아남고 싶다면 스스로 독립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업물을 만들어 내고, 대중에게 선보이고 인정받는 삶이야말로 예술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디자이너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도 점차 흐려지고 있다고 본다. 자신을 위한 디자인이 바로 예술이고, 모든것을 제어하는 1인 기획자가 예술가로 살아남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평론가들이 보면 어이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만 하다가 시기를 놓치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죽기전에 이름 석자라도 세상에 남기려면 정말 끊임없이 노력해도 모자른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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